『교정의 요정』

(유리관, 민음사, 2024)

민음사 《탐구》 시리즈에서 ‘일기들’이라는 기획으로 출간된 책. 《탐구》는 젊은 작가들의 동시대 연구를 쉽게 풀어 전하려는 의도를 가진 시리즈로, 일전에 이 시리즈에 속한 윤아랑 영화평론가의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을 읽은 적 있다. 난 영화를 좋아하니까.

이 책을 읽었을 당시, 나는 영화를 사랑한 일이 내게 남긴 게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남겼지만 그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니까, 그게 좀 힘들었다. 내가 영화를 통해 얻은 것들을 남에게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내가 영화를 본 그 시간들이 헛된 게 아니라고 남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으니까. 내적인 풍요. 이걸 남에게 설명하는 건 참 어려웠고, 남들이 보기에 나는 그냥 대학 다니는 내내 열심히 논 애였을 뿐이다(틀린 말은 아님). 영화를 사랑한 걸 후회한 적은 없지만 당시엔 이런 게 좀 힘들었다.

근데 이 책에 ‘쓸모없음’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영화나 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쓸모 없다고, 쓸모에 집착하지 말라고. 작가의 주장과 내가 받아들인 의미가 완벽히 일치하진 않지만, 어쨌든 당시의 나에게 이 문장은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애초에 쓸모가 없구나. 그래, 쓸모 좀 없으면 어때. 내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감정들은 전부 진짜야.

쓸모가 없음에도 우리가 영화와 글쓰기에 매달릴 필요가 있다면, 주변부이며 유희의 일종으로 출발한 이 일이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어떤 감흥을 주기 때문인 거죠.

(...)

여기 있는 우리에게 결국 내 삶을 바쳐 가면서 영화를 보고 영화로 글을 쓰는 일은 ‘세상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고 대할 수도 있구나!’하는 흥미가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 되면서 시작하고 끝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세상의 다른 ‘인문학적’ 행동들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다만 이 기분이 나의 만족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에 대한 적확한 인식’을 부단히 의식한다는 중요한 차이는 있죠. 외재화된 만족점이라고 할까요. 그렇다면 이때의 기분은 나의 것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것이고 또 그런 사실이 인지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카이계(セカイ系) 같은 과장된 자아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존속과 운동 그리고 나와 세상이 맺는 관계가 이미 기분의 층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인 거죠.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77-78쪽.)  

아무튼 《탐구》도 그렇고, 《한편》도 그렇고 민음사가 이런 기획을 참 잘한다. 적잖이 지적허영 채워주는 인문학 시리즈. 《탐구》 시리즈에서 새 기획에 나온다니 솔깃했고. 그 기획이 ‘일기들’이라니. 난 에세이 좋아하니까 더 솔깃했고.

『교정의 요정』은 편집자가 쓴 일기를 묶은 책으로 출판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책 만드는 얘기? 못참지; 이미 유튜브로도 책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고(편집자K, 민음사TV 등), 8년 차 출판편집자가 쓴 에세이인 『책갈피의 기분』이라는 책도 꽤 즐겁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이 책도 구매~!

잠깐만, 여기서 ‘좆되게’는 ‘좆 되게’로 띄어 씀이 적절할까?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좆되다’는 한 단어가 아니다. ‘한 단어’라는 것이 말은 쉬워도 모호한 개념이다.

일단은, 국립국어원에서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렸으면 한 단어이고 안 올렸으면 아니다. 국어원 측에도 물론 나름의 기준이 있어 어떤 단어를 올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심사를 거칠 것이다. 사전에 없는 걸 보면 ‘좆되다’는 아직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걸 올리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랫동안 사용해야 할 것이다. 

(『교정의 요정』, 21쪽.)  

『호르몬 일지』

(영이, 민음사, 2024)

같은 시리즈(《탐구》), 같은 기획(일기들)의 책. 트랜스젠더인 작가가 의료적 트랜지션을 위해 호르몬제를 투약하며 나타난 신체적 변화와 그에 따른 감정적 반응을 기록한 ‘투약기’이다.

이건 사자마자 읽었다! 그러니 간단한 후기를 남겨보겠다. 우선 ‘일기들’이라 그래서 에세이일 줄 알았는데(에세이가 맞긴 함) 정말 완전 날것의 ‘일기’여서 살짝 당황했다. 욕과 음슴체가 굉장히 많이 나오고. 왠지 트랜스젠더 트위터리안의 1년치 탐라를 읽는 기분? 이 부분에서 호불호 조금 갈릴듯. 몇몇 에세이들 후기에 ‘이런 건 네 일기장에나 써.’라는 말이 따라 붙듯이 이 책도 그런 말을 충분히 들을 만한듯(근데 이건 애초에 진짜 일기를 묶은 책이다).

그렇지만 ‘누구의’ 일기장인지가 중요한 거겠지. 살면서 트랜스젠더의 일기장 읽을 기회가 뭐 얼마나 있겠어. 호르몬제 투여로 작가가 겪는 신체적 변화는 대강 이렇다. 체모가 적어지고, 가슴이 나오고, 호르몬제의 부작용으로 몸에 열감이 많아지고. 그런데도 자주 이런 변화를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걱정한다.

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ADHD 진단을 받고 각성제를 복용한지 꽤 됐는데 아직도 약의 효과를 의심할 때가 많다. 안 먹으면 기운 없고 어디 자주 부딪히는 거 같고 할일을 자주 미루고, 근데 또 먹었다고 대단한 효과가 있는 거 같진 않고. 아무튼 이렇게 헷갈릴 때가 잦아서 작가의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이라는 거, 정신이라는 거, 정말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당근밭 걷기』

(안희연, 문학동네, 2024)

나의 SNS 팔로워들이라면 아마 알 것이다. 내가 안희연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너무 좋아해서 친구들에게 선물로 사주기도 했음), 최근에 그의 또 다른 시집인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을 얼마나 즐겁게 읽었는지. 그런 안희연 시인이 신간을 냈다잖아요!(저번달에 나왔음)

먼저 읽은 친구가 SNS에 추천글을 올렸길래 ‘나도 안희연 좋아해~’하고 아는 체를 했더니 빨리 『당근밭 걷기』 읽고 후기 내놓으랜다. 그래서 얼른 읽어야 될 거 같아서 샀다. 원래 살 생각이긴 했지만.

『야생의 심장 가까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민승남 옮김, 을유문화사, 2022)

어쩌다 국문과 수업을 들었는데(나는 타과생임) 거기서 영문과 재학생과 말을 텄다... 타과생들이다보니 어쩌다 이 수업 듣게 됐는지 얘기하게 됐고, 둘 다 문학을 좋아한다는 접점이 있어서 어떤 책, 어느 작가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내가 무슨 작가를 얘기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정현이었던가. 영화 얘기하다가 요새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좋다고 한 건 기억나는데.

아무튼, 그 친구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아냐고 물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국내 번역서들 중에서도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콕 집어 추천해준 그 친구. 그때 그가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떤 단어만큼은 너무도 선명히 기억에 각인됐다. “미친 여자” 미친 여자 이야기라고? 아, 이건 못참죠. 이만큼 확실한 재미 보장 영업 멘트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뜬금없게도 내가 처음 구매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책은 『아구아 비바』였다. 그날은 왠지 노란색 표지의 책이 사고 싶은 날이었다. 그냥 그런 날이 있다. 그리고 『아구아 비바』는... 정말 아름다운 책이었다. 마치 글로 연주하는 즉흥곡 같은 느낌. 

이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하나 남겼다. 거기엔 이런 문장이 적혀있다. “읽자마자 휘발되어 내 안에 거의 남지 않거나 남더라도 흔적처럼 남게끔, 그렇게 의도된 채 쓰여졌다는 게 이 책을 읽는 독서 경험의 핵심이다. 그럼에도 독자는 끝끝내 자신 안에 잡아두고픈 문장을 만날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남에게 설명하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래도 굳이 설명하자면 삶이라는 형식 안에서 글쓰기와 존재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든 작가의 기록이고, 그래서 글 역시 일정한 형식과 규칙 안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그 한계치를 ‘실험’하듯 적혀있다. 실험적인 글답게 다소 난해하지만... 정말로 아름답다.

나는 어떤 답도 얻지 못한다: 나는 있다. 내가 삶에서 얻는 답은 그것뿐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으로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나로 있다. 가끔 나는 비명을 지른다: 더 이상 내가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나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고,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삶의 음역대를 형성한다.

(30-31쪽.)  

나는 지금, 바로 이 중요한 순간에 당신에게 글을 쓴다. 나는 오직 지금 속에서만 이야기를 펼친다. 나는 오늘 말한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이렇게 실재하고 또 기필코 사라져 버릴 순간에. 자그맣고 틀에 갇힌 내 자유가 나를 세상의 자유에 연결시킨다 

(37-38쪽.)  

나는 생각을 어떻게 지어내는지 안다. 나는 요동치는 새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쓰는 건 그저 하나의 억양일 뿐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43쪽.)  

방금 내가 쓴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하지만 전체를 다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그게 나에게 일어난 일이니까. 나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매우 존중한다. 

(44쪽.)  

리스펙토르의 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제 나는 안다. 『야생의 심장 가까이』는 또 얼마나 황홀할까. 나는 이제 미친 여자의 이야기를 읽을 준비를 마쳤다.

『희망』

(양귀자, 쓰다, 1990)

하늘의 별 대신에 마음에다 별밭을 가꿀 수도 있다는 것, 타인의 삶에 깊이 관여하며 사는 것도 구원의 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골방의 어둠 속에서 깨우쳤다.

나는 여태 사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살고 있었다. 혼자서는 절대 넓어질 수 없다. 관계 맺은 만큼의 넓이로 인생은 경작된다. 

(264쪽.)  

“민구야. 너 이담에 뭐가 되고 싶나?”

“민구. 민구가 되지.”

“아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대통령? 장군? 뭐 그런 거 있잖아.”

“대통령 싫어. 난 민구 될래. 민구가 좋아.”

녀석은 악착같이 계속 민구가 되겠단다. 그것도 아주 완강하게. 고통이 뭔지, 바보가 뭔지, 희망이 뭔지를 모르는 민구. 가만 생각하니 민구의 대답이 정답 같기도 했다. 마땅히 민구는 괜찮은 민구가 되고, 진우연은 아주 괜찮은 진우연 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448쪽.)  

『동경』

(김화진, 문학동네, 2024)

우직하고 오래가고 싶어.

그렇게 얘기했을 때 아름은 그렇게 될 수 있어, 라고 해주지 않았다. 

해든은 민첩하고 계속될 거야.

그렇게 말해주었다. 듣고 싶었던 말이 뭔지도 몰랐던 나에게 최고의 위로를 건네주었다. 

(108쪽.)  

그런데 말이야. 마음에 있는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말을 못해도 있는 마음 같은 게 있어. 그 마음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 알아도 말하지 못하고 몰라도 비슷한 걸 말해버리는 사람도 있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느끼는 건 진짜야.

(112쪽.)  

부랴부랴 정리를 마무리하고서 놓친 것은 없을까 하는 마음에 전시장 쪽을 뒤돌아봤다. 자기도 모르게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구석에 얼기설기 쌓인 사금파리 탑을 찍었다. 찰칵, 찰칵찰칵. 그뒤에야 천천히 전시장을 나왔다. 

(133쪽.)  

『현대 생활의 발견』

(오노레 드 발자크, 고봉만·박아르마 옮김, 민음사, 2021)

오늘날 현대 풍속은 세 계층의 인간을 만들어 냈다.

일하는 인간,

생각하는 인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

바로 여기에서, 보헤미안의 시적이고 자유분방한 소설에서부터 입헌 군주들의 단조롭고 지루한 역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삶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세 개의 존재 방식이 생겨난다. 즉, 바쁜 삶, 예술가의 삶, 우아한 삶. 

(10쪽.)  

지금은 귀족적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다음과 같이 솔직히 말하리라. 사회의 최하위 계층에 있는 사람은 신에게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의 운명에 가래침을 뱉는 일밖에 없다. 

(19쪽.)  

사회가 존재한 이래 정부라는 것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서 체결된 늘 필요한 하나의 계약이었다. 이른바 몽고메리식 배분*에서 야기된 이러한 내적 투쟁은 문명인들에게 재산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재산은 모든 사적인 야심을 전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고통스럽고 모욕적인 처지에 놓이지 않겠다는 욕망에서 노블레스, 귀족 계급, 특권 계급, 상류 사회로 편입하려는 남녀들이 유래했기 때문이다. 

(19-20쪽.)  

몽고메리식 배분: 한쪽이 모든 것을 가지면 다른 쪽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되는 방식을 말한다. 가난한 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부유한 자들 사이에 체결된 일종의 보험 계약이었다.

그리고 식전빵이 나오자 하나를 집어들고 말했다.

"여긴 이걸 먹으러 옵니다. 삶이 이렇지 않습니까? 메인 메뉴가 다는 아니지요. 선택을 결정짓는 게 식전빵이기도 하다는 거....... 식기 전에 드세요."

나는 전시회에 다녀오면 거기서 벗어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합니다. 출구가 몇 겹의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예술이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는 막다른 골목이지만, 꿈으로 넘어가서 계속 얘기하자고 말해주는 마음. 그게 예술가가 우리에게 심어주는 빛이죠. 안이지 작가님, 당신의 전시가 끝난 후에도 나는 한동안 당신 작품 속에 살고 있을 겁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내가 진짜라 믿은 작품, 진짜가 아닐 수도 있는 작품, 그러나 내가 고른 작품. 그저 그 위치에 있었던 작품 하나를 가지고 로버트 재단을 벗어났다.

불타는 작품만이 진짜라고. 불타고 있을 때, 그 순간의 화력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런 의미에서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온 건 진짜일 수가 없다고. 

작가의 책상 위에서 발견되는 것은 잔해뿐이다. 로켓 아래의 추진체처럼, 이야기를 중력 너머로 쏘아 올리기 위해 온몸을 불태우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버려지는 존재. 그러므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원본을 찾고 싶다면 독자의 책상으로 건너가야 한다. 우리가 읽던 책의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살짝 접을 때,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거나, 굳이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책 속의 말이 그걸 바라보는 이를 흔들 때, 책은 비로소 원본이 된다. 하나뿐인 진짜가 된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