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단단하게 익은 아보카도는 울타리를 만든다. 얇게 썬 과육을 조금씩 밀어가며 모양을 잡으면 연약한 테두리를 갖출 수 있다. 초록의 울타리 속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이 좋다. 적양파를 아주 얇게 썰어 간장에 무친 뒤 흰살 생선의 회나 게살을 올리면 잘 어울린다. 식초와 소금으로 간한 밥을 채우고 연어와 케이퍼를 올려 작은 덮밥 케이크를 만들어도 좋겠다. 비건이라면 다져서 간장에 조린 두부와 궁합이 좋을 듯하다. 무순을 조금 올리면 예쁘겠지. 최근에는 울타리 속에 성게알을 넣고 단 새우 회로 덮은 조합을 시도했는데 부드럽고 끈적한 세가지 재료가 뒤섞이며 관능적인 맛을 냈다. 크림화된 과육이 입안을 확장시키는 듯한 식감. 어떤 재료와의 조합을 시도하든 아보카도는 전체를 아우르는 부드러운 매개체가 되어준다.

(12-13쪽.)

『여왕의 변신』

(피에레트 플뢰티오, 이상해 옮김, 레모, 2020)

프랑스의 동화 작가 ‘샤를 페로’를 아는가? 이름은 처음 들어봤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동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신데렐라』, 『빨간 모자』, 『장화 신은 고양이』 등을 쓴 작가이기 때문에. 자크 드미 감독의 <당나귀 공주(1970)>도 샤를 페로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다.

전설적인 동화 작가 샤를 페로의 작품들도 오늘날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 이를 테면 여성관? 『여왕의 변신』은 피에레트 플뢰티오가 샤를 페로의 동화들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쓴 글이다.

참고로 레모 출판사는 이번 도서전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부스였다. 엄청 작은 부스, 심지어 그 공간을 두 출판사가 공유하고 있어 자리가 매우 비좁았는데도 디피된 책들의 디자인이 눈에 띄었고, 책마다 붙어있던 짧막한 소개가 매우 섬세했다. 『여왕의 변신』도 짧은 소개가 붙어있지 않았다면 아마 구매하지 않았겠지... 책을 사면 노트도 한 권 주시는데, 노트 디자인도 예쁘다. 온통 좋은 것 투성이.

집에 와서 서치해보니 아니 에르노 『사건』(민음사)의 번역자이기도 한 윤석헌 번역가가 차린 출판사라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서. 오타쿠가 자기 장르 영업하려고 회사까지 차렸다고? 나는 오타쿠들의 안목을 신뢰한다.

『나의 천사』

(이희주, 민음사, 2024)

『보건교사 안은영』, 『82년생 김지영』, 『해가 지는 곳으로』 등으로 유명한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신간이다. 일단 표지가 매우 기묘하다. 민음사의 정기현 편집자(특: 기이하고, 섬뜩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함)가 편집을 맡았다. 내용도 기묘할 거 같다는 뜻이다. 여름은 기묘한 게 참 잘 어울리는 계절이죠.

『숄』

(신시아 오직, 오숙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문학과지성사의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에 속해있는 책이다. 이 시리즈에도 재밌어 보이는 책들 많은데. 뒤라스, 베르그송, 베케트, 콩스탕 등등. 신시아 오직도 너무 유명한 이름이라 보관함에 넣어놨는데 얘도 이러다가 보관함에서 생을 마무리할 것 같아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사는 김에 같이 샀다. 책이 썩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여름은 부패의 계절. 다들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묵은 책들을 털어내는 여름 보내시길.

신시아 오직은 단편소설에 주어지는 상인 오헨리 상을 최다 수상한 작가라고 한다. 표제작인 「숄」도 오헨리 상 수상작인 모양. 오직은 유대인이고 「숄」도 홀로코스트 얘기를 다룬 소설인가보다. 띠지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돌아보는 인간 조건의 무게’라고 적혀있네...

집이라는 것이 반드시 물리적인 공간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 그것이 반드시 장소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는 것, 고향은 복수의 공간일 수 있으며, 때로는 타인이 나의 고향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 고향은 상황이거나 사건의 형태를 띌 수 있으며, 당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타국의 언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요. 여러분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저에겐 이 시간이 정말 필요했습니다…. 나에겐 이것이 정말 필요했습니다…. 나는 필요했습니다…. 나는 정말 필요했습니다….

(278-279쪽.)  

그는 아이오와를 새로운 글의 고향으로 삼은 것 같다. 그의 새출발을 응원한다. 나는 이제 앞으로 올 그의 에세이를 기다리겠지….

길이 아닌 길을 따라 걷는 것, 그것은 진짜 길을 걷기 위한 준비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길이 아닌 길을 충분히 걸어야 사람이 걷도록 만든 길도 걸을 수 있게 된다고 나는 믿고 싶다.

(72쪽.)  

어느 새벽 클럽의 어렴풋한 불빛. 최소한의 불빛과 노래방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빛만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 살면서 많은 빛이 필요한 건 아니리. 어쩌면 빛 없이도 살 수 있으리. 다른 존재와 부딪히면 즉사하는 작은 개구리. 나의 개구리는 아주 소심하게 길을 건넜지. 극단적으로 소심해지는 것도 길을 건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201쪽.)  

아이오와에서 나는 처음으로 영어로 시를 쓰게 되었다. 그 시는 사랑이 있어 가능했다. 오릿에게 주려고 쓴 시였으니까. 사랑으로 밀어붙이면 모르는 언어로도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선오의 경우, 피자를 주문하거나, 사람들과 스몰토크를 한다거나, 뭐 그런 종류의 영어는 부족할지 몰라도, 문학에 관해서라면 일시적으로 영어 천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219-220쪽.)  

『영화 도둑 일기』

(한민수, 미디어버스, 2024)

자신을 ‘토렌트 불따충’으로 소개하며 시작하는 책. 물론 이것은 어그로를 끌기 위한 문장이고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왜 ‘해적’이 되었는가? 독립·예술 영화관이 서울에 밀집되어 있어서, 영화관들이 매번 했던 기획전들만 재탕해서(왕가위, 에릭 로메르 기획전은 왜 맨날 하는 것이며 지금 CGV에서 진행중인 라스폰트리에 기획전도... 물론 해주면 나는 감사합니다!하고 보는 관객1이지만 전혀 참신하지 않은 기획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시네마테크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보고 싶은 영화를 한국에서 서비스해주는 플랫폼이 없어서, 세상에 영화가 너무 많아서, 아직 못 본 영화가 너무 많아서, 지금 이 순간에도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어서, 영화가 너무 좋아서. 영화가 정말 좋아서.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씨네필도 영화를 지나칠 수가 없는 법이다. 고로, 홍수처럼 범람하는 영화 파일들 위를 유영하는 온라인 상의 우리는 그것을 낚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책은 알려준다. 고기잡이에도 규칙이 있다는 것을.

위 사진을 보고 좌절한 적 있는 씨네필이라면 분명 재밌게 읽을 책. 이 책에는 또 다른 해적인 umma55라는 분의 인터뷰가 실려있는데 개인적으로 그 파트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 두고 보세요. 중년 여성 씨네필이 될 테니까.

영화를 사랑한 시간과 마음을 인생에서 삭제해버리면 내 삶이 너무 공허하게 느껴질 것 같다. 영화가 정말 좋다. 앞으로도 좋아하고 싶고. 근데 요즘은 그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다는 예감이 자꾸 든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게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아직 일주일 정도밖에 안 지난 게 코미디지만. 돌아서면 보고 싶은 거, 이거 사랑인데; 물리적으로 보진 못해도 어쨌거나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무튼 씨네필들에게 『영화 도둑 일기』를 추천합니다.